March 17, 1919 | The Omaha Daily Bee

일본 헌병대 군중들에 총 발포, 시위에 참가한 많은 민간인들 사망

AP 통신. 3월 16일, 상하이 – 서울에서 배포되는 한 일본신문을 인용한 로이터통신의 번역본에 따르면 3월 4일 한국 성천에서 3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평양 남쪽의 서청 마을에서는 네 명의 헌병대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군중들에게 발포했으며 이로 인해 5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군중들은 결국 헌병대원들을 죽였다. 양덕에서는 20명의 군중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독립활동

독립운동 기간 내내 여학생들의 활동은 신문에 많이 보도되어 주목받았는데, 특히 안주에서 두 명의 한국인 헌병대가 군복을 버리고 군중에 합류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일본 경비대는 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여덟 명이 숨지고 서른 명이 부상 당했으며 네 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한국 국경을 넘어 이곳에 도달한 정보에 따르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는 일본인에 의해 보도된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고 한다. 모든 계층의 한국인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계획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번 봉기는 고종 전 황제의 장례식 당일인 3월 4일로 계획됐으나 민족독립주의자들이 갑자기 계획을 바꿔 3월 4일 이전에 시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 헌병들은 장례 기간 동안 임무를 위해 서울로 보내졌고, 계획했던 만세운동은 조치도 취하기 전에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모든 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았고, 천여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됐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만세운동 발생과 관련 선정적인 내용의 소문이 여러 차례 나돌았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한국이 합병된 이후, 한국에서 독립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왔다.

 

윌슨 대통령의 협조를 구하다

3월 10일, 워싱턴 —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모색하는 평화회담에서, 한국이 만국의 일원으로 자치정부에 적합하다는 결정이 나오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사본은 헨리 정과 함께 미국 내 협회의 공식 대표인 이승만 박사에 의해 금일 여기서 공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 완전한 자유를 부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평화회담에 보내지기도 했다. 이 편지는 파리에 보내지기 위해 미국 국무부로 보내졌다.

두 서한에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조약의 의무를 직접적으로 위반하여 한국에 대한 보호국가로서의 입지를 세웠고, 그 이후 한국이 잘못 지배된 이후, 한국의 천연자원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고, 한국의 문헌은 억압되고, 한국의 종교적인 신앙도 감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리승만 박사는 모든 해외 거주 한국인을 대표하여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연락을 해 이번 달에 체포된 독립 시위대를 잔혹하게 다루어지지 않도록 일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청했다고 금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