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7일 |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新聞)

-폭동 기사 게재가 해금-
서울 외 십 수 개 소에서 시위가 발발하고 곳곳에서 경찰대와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
관헌의 경비는 점점 엄중
수상한 외국인이 출몰

 

3월 6일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당국자 간 회의를 통해 앞으로 소요사건에 대한 신문보도 제한을 풀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에서 남녀 학생들이 속속 구속되다

3월 4일 서울을 중심으로 다시 소요가 발생하였다. 3월 5일 장례식 절차가 거의 끝날 오후 4시경 동대문 근처에서 학생 3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시위운동을 하다 헌병경찰에 의해 제압당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남녀 학생들과 간호부들은 모두 왼쪽 팔에 붉은 천을 두르고 있었고 검거된 자는 100여 명에 이르는데 그 절반은 기독교 학생과 간호부였다.

3월 5일 오전 9시경에는 남대문에 모인 시위자들이 대한문으로 가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 집단에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5, 6명이 참가하였다.

이들 간호부들은 직접 독립선언서를 살포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체포되었다. 조선인 중등학교 남녀 학생들은 6일에도 단 1명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급장(반장)의 이름으로 매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 집합하도록 유도한다.

여학생들은 졸업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시위운동의 참가를 권유하고 있다. 더욱이 전차 승무원까지 참가를 강요하고 있다. 3월 1일 이래 검거된 남녀 학생들은 약 400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