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 1919 | The New York Times Current History Vol.10

한국독립운동의 사건과 원인에 대한 간략한 보고

파리 주재 중국 대표단이 산둥 조항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 체결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일본이 한국에서 행했던 방식을 중국이 취한 행동 근거 중 하나로 언급했다. 한국은 일제 치하에 있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 했고,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그 이후 한국인의 소극적인 반란은 지속됐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한국인에 대해 불필요하고 가혹한,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했다고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목격자들은 전한다. 다음 기사는 한국의 영어 사용자가 CURRENT HISTORY에 보낸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적 원인과 현황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조명한 것이다. 미국에 보내는 문서에 대한 일본의 검열이 엄격하기 때문에 사건 관련자들의 이름은 생략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1905년 한일 병합을 계기로 밀접하게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인 불신의 씨앗은 수 세기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300여 년 전 일본인들은 요새화된 섬에서 한국을 침략했고, 많은 한국인들이 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오래된 침략 중 하나는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의 한 거리에 “귀무덤 기념비”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 기념비 아래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 초기에 베어간 한국인들의 귀와 코가 묻혀있는 곳으로 일본의 전쟁 방식에 대한 암울한 증거이다.

근대에 들어서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1894년의 중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처럼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일본과 여러 국가는 이러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남하하려는 의도가 있던 러시아 때문에 일본과 한국은 동맹을 맺었고, 한국의 재정적 원조, 노동력, 교통시설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승리 후에 일본은 한국을 일본 제국의 일부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려는 계획에 대해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동의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