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8, 1919 | The Pueblo Chieftain

프레데릭 J. 하스킨 기자, 6월 14일, 워싱턴 D.C. – 7년간의 투옥과 고문 끝에 한국 독립운동 워싱턴 지역 대표인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지난 4년 동안 세계를 뒤흔든 정치적 격동 속에서 이승만 박사를 동양의 새로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혁명(자주권)을 위해 어떠한 무기도 없이 자신들의 목소리와 죽음을 각오한 용기만을 가지고 싸웠다. 그들은 비밀리에 새로운 공화국 선언문을 인쇄해야 했고,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때도 그의 당선 소식을 전보조차 보낼 수가 없었다. 이승만 박사의 선출 메시지는 한 외국인이 비밀리에 인형 머릿속에 감춰 바다 건너 가져왔다.

 

혁명운동은 어떠한 무기도 없이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약 3만 명의 한국인을 체포했고, 1만 명의 한국인을 살해했다고 한국인들은 주장했다.

한국 군중들이 거리에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외치자 일본 군인들이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들이닥쳤다. 혁명가(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의 총검 앞에 흩어지고 일부는 항상 그랬듯이 죽거나 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또 다른 군중집회는 열렸고 한국인들은 독립선언을 외쳤다.

일본군은 혁명가(Revolutionary)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명확히 확인되고 보도되니 일본군의 만행을 부인할 수 없다.

3개월간의 비폭력 저항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헌법을 제정해 이제 임시공화국의 대통령 선출을 발표했다.

이승만 박사의 이력은 그가 특별히 민족의 지도자로 적임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공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발간했는데, 그 일간지는 정책에 있어서 독립적이었으며, 한국에서의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에 관해 모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발행하는 신문은 매우 유명했고 그로 인해 이승만 박사는 정부의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투옥됐다.

그는 7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몇 달 동안은 고문의 일종인 형틀을 목에 걸고 있었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와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그는 교사, 전도사, 그리고 정치가로 활동했다.

 

이승만 박사가 전한 일본이 점령한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04년, 한국은 공동의 적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을 돕기 위해 일본에 영토를 개방했다. 그러나 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서 물러나기로 협정조약을 맺었지만 그 조약을 무시하고 시베리아에 있던 일본군이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을 점령했다.”

“전쟁을 통해 일본은 그토록 원하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얻지 못했지만 승리의 결실이라며 한국을 요구했다. 일본은 한국이 자국의 잉여 인구를 내보내는 곳이자 만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미국에게 한국이 자진해서 일본에 항복했으며 한국의 황제는 포로로서 다른 국가에 어떠한 메시지도 보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전 세계가 알고 있던 한국의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은 일본의 군사 통치하에 식민 지배를 당했다. 한국은 4,000년 동안 자주국가로 운영돼 왔으며, 그 오랜 기간 세상이 모르는 가장 놀라운 문명 중 하나를 이루어낸 나라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보다 100년 앞서서 한국은 인쇄술과 음성 활자(한글)를 발명했다. 또 현수교를 만든 최초의 국가였다. 한국은 일본에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으며 일본 문명 발전에 귀중한 공헌을 했다.”

“지금 일본이 한국의 독립권을 약탈하려 한다. 일본은 한국 내 학교에서 한국의 역사나 지리를 가르치거나 심지어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한 학생은 한국 국가를 부른 죄로 3개월간의 감옥 생활과 미화 300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일본의 공휴일만이 유일하게 지켜지고 있고 한국인들도 일본의 공휴일만을 기념해야 한다.”

“일본이 5년 전 발표한 한국 내 공립학교, 사립학교, 성경학교 등에서 더 이상 성경을 읽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국 학자와 정치인들은 기독교 신자였으며, 일본은 기독교가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 칙령은 전 세계 교회와 선교사들의 항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일본은 이 칙령이 10년 동안 시행되지 않도록 법령을 수정했다.”

“한국인들은 이런 모든 자유의 제약에 대해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했으나 항상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미국과 같은 정부를 갖기를 염원했다.”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올 2월 한국의 마지막 황제 서거 후 일어났다. 3월 1일, 황제의 장례식 발인 직전, 전국의 모든 대도시가 같은 시간에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3백만 명의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군들에 의해 공격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4월 23일, 한국의 13개도의 대표자들이 모여 헌법 초안을 만들고 의회가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유효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독립선언문이나 헌법을 감히 인쇄할 수 있는 인쇄소가 없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나무판에 인쇄 양식을 조각해 인쇄하고, 수천 권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이승만 박사에 따르면, 한국독립운동의 목적은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일본의 지배에 대한 항의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려 여론의 압력으로 일본의 부당한 정책을 압박하고 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요약했다.

“우리는 미국이 한국을 위해 육군이나 해군을 보내 싸워야 한다고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고 이승만 박사는 말했다. “우리는 미국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을 요청한다. 1882년 한국과 미국의 조약에 의거해 미국이 한국을 위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한국과 미국이 맺은 조약은 한국이 맺은 첫 번째 조약(조미조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양국 중 어느 한쪽이 또 다른 어떤 권력에 의해 부당하거나 억압적인 상황에 처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단 확인을 거친 뒤에 서로 상조해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1882년 체결한 조약에서 이 조항은 미국이 먼로주의(불간섭주의를 표방한 미국 외교정책)에 따라 한국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한 한국의 대답이다.

일본은 한국독립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한국에 자치권 보장과 군사 통치 해제를 약속했지만 이런 약속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애당초 한국인들은 일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설사 일본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치권이 아니었다. “완전한 독립만이 한국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이었다.

미국 정부에 대한 한국인의 진정서는 아직 작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도 새 공화국의 존재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이에 앞서 미국 정부에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미국과 멕시코, 하와이, 중국,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이승만 박사와 정한경을 선출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파리로부터의 지시가 없다고 한국대표단의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가 랜싱 장관에게 전보를 보냈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한국대표단이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파리로부터의 답을 들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국대표단이 중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해 자신들의 주장을 발표할 기회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대표단이 강화회의에서 호소하려는 것은 일본이 ‘강제’와 ‘위조’로 된 한국과의 병합조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결론은 “동양 국가들이 가진 진실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동양의 평화를 위해 강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는 유일한 국가다. 일본이 러시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든 이후 동양에서 미국의 위상은 일본의 아시아 지배 계획에 유일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