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3, 1919 | The New York Times

장로교회, 살인과 고문에 대해 공식 보고 
기독교인 마을이 불타고, 최소 서른 명의 남성들 사망

 

어제 미국 장로교회 본부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에 의한 잔혹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당국에 의해 몇몇 선교사가 투옥됨에 따라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내 대표자들이 조사한 결과물이다. 한국으로부터 받은 정보는 일본의 검열을 피해 전달됐다.

수천 단어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미국 장로교회가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미국 신문들은 이미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본 만행에 관한 보도로 넘쳐난다. 이런 행위의 근원과 원인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 보도에서 그런 부분에 집중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벨기에가 전 세계인의 손에 달린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전해지고, 이것들이 후에 건설적인 개혁을 위한 기초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여기서 보도된 것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중복될 수 있으며, 일부 보도는 멀리서 받았기에 우리가 보도한 내용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좁다. 법적 자격이 있는 증인의 증언에 기초해 작성한 것이 아닌 것은 생략했으나,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인 것으로 알려진 사건에 국한해서 보도한다는 지침을 세웠다.”

“많은 보도 내용이 극도로 역겨워서 이런 일을 목격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독자들도 분노로 피가 끓어오를 것이다. 우리는 보도 내용 자체의 교훈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한다.”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다면 그 보도는 너무 길고 끔찍할 것이다.

 

정치 혐의자에 대한 고문

혁명운동(독립운동)에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경찰의 예비조사에 따르면, 남성들은 구타를 당해 사망하고 여성들이 거의 모든 가능한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는 “인간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중 좀 가벼운 처벌이 수감자의 몸에 대나무 몽둥이로 90대를 때리고 발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살아있다면 거의 죽은 상태로 병원에 보내졌다.

그러한 희생자 중에 제화점에 일하던 19세의 마르고 소심한 기독교인 소년이 부유한 한 남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됐다.

그와 관련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경찰 본부에서는 부유한 남성을 먼저 심문했다, 일본 경찰은 그 남성에게 누가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발행하고 배포하고 있는지 밝히면 풀어주겠다고 했고, 그는 실토하고 말았다. 그의 희생양이 된 제화점 소년은 두 가지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제화점 소년이 몹시 두들겨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이 됐다. 33일 후, 나는 제5 장로교회의 몇몇 여성 신도들과 만나 그 소년이 공중 병원에서 죽어가는 상태라고 들었다. 그동안 그의 사망 관련 보고가 없었던 만큼 소년이 최소한 목숨은 건지기를 바랬다. 나는 어제 그 소년을 보러 병원에 갔다.”

“일본 경찰이 소년을 병원에 입원시킨 것은 자기들 손으로 소년을 죽이는 것이 싫었거나 그가 기적적으로 생존해 다시 고문하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 사무실로 들어가 신분증을 보이고 경찰의 입회 없이 그의 병실로 안내돼 깜짝 놀랐다. 병실에 들어서자 매우 야위고 병든 소년을 보았는데 그는 5주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하나님이 나를 그 소년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병실에 있었다. 소년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찬송가 몇 곡을 부르고 그와 함께 기도한 후 집으로 향했다.”

다음은 그가 전한 그의 이야기다.

“소년이 살아있는 것은 확실히 기적이었다. 체포된 다음 날, 그는 한국독립운동과의 연관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젊은 애국지사의 시련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를 거부하자 그 소년은 여섯 시간 동안 끊임없이 고문이 동반된 조사를 당했다. 그의 팔은 상체가 크게 뒤틀릴 때까지 팔꿈치 위로 고리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그것은 구타를 위한 통상적인 준비였다. 그리고서 구타와 발차기가 기절할 때까지 가해졌다. 소년이 마실 찬물이 주어졌고, 그 물은 몸에도 부어지고 다시 고문이 시작됐다. 그 후 이어진 취조에도 사실을 밝히기를 거부하자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년의 다리 윗부분에 난 상처를 하나 보았다. 그것은 빨갛게 달군 쇠로 5인치 정도 그슬린 상처였다. 상처는 모두 네 군데에 있었다. 나는 소년의 손에서 구타로 인해 부풀어 올라 죽어있는 피부를 봤다. 한 손은 정상 크기보다 두 배로 부어 있었다. 한 손가락의 두 마디와 두 손가락 끝은 그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소년의 머리는 고문 당시 받은 타격으로 아직도 부어 있다.”

“곧 의사가 정기 회진을 하며 소년을 진찰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향해 “가슴과 폐는 괜찮았는데”라고 말했다. “추위에 노출돼 가슴이 부었나요?” “아니요.” 의사가 소년의 옷을 내려서 좀 더 자세히 검사했는데, 나는 그의 복부 부위가 (통증과) 전부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총검으로 찔린 상처인지, 의사가 절개한 부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치료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는 그 부위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33일 후 소년은 가슴부터 사타구니, 그리고 엉덩이에서 엉덩이까지 약간의 터치도 견딜 수 없이 아파했다. 머리에는 열이 나서 얼음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몸은 황폐해졌고 그는 단지 앉은 자세로만 일어설 수 있었다.”

 

의심받는 선교사

“경찰서에서 받은 나흘 동안의 고문과 그 후의 고통 받은 기간 동안 의사는 그 소년을 세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의사는 그 소년이 죽을 것을 예상했고, 일본 경찰들에게 그 소년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신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한 후 그는 회복의 희망이 보인다.”

“나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인력거를 탔다, 소년에게 달걀과 사과, 밀크파우더와 깨끗한 베개 커버와 옷을 전해 주었다. 소년은 멋지게 변신했다. 그가 입은 옷은 처음부터 그가 입었던 것 같았다. 내가 소년을 방문했을 때, 한 한국인 간호사가 동석했는데 나중에서야 그녀가 동석한 이유를 알게 됐다.”

“소년의 더럽혀진 옷들은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말아져 있었다. 우리는 기도를 했고, 나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한 일꾼과 마주쳤다. 그는 그 병든 소년에게 “너는 기다려야 한다.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상상해 봐라, 제발. 그들은 내가 인력거를 이용해서 그 소년을 데려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나를 체포했다.”

“그는 침착하게 사무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30분 이상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겪은 끔찍한 곤경을 상상해 보라! 나는 저녁 식사용으로 생선을 샀고 손님이 오기로 돼 있었다. 정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생선과 쪽지를 든 여성을 급히 보내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기 위해 앉았다. 동양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은 허둥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실히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나를 데려갈지 궁금했다. 그들이 나를 태워갈지 아니면 걸어서 가게 할지 궁금했다. 마침내 나의 즐거운 상상은 카키색 옷을 입은 무장 병사들이 아니라 나를 인터뷰하러 온 사복 차림의 일본 형사에 의해 깨졌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했고 그는 나를 매우 온화하게 대했는데, 그는 경찰서에서 우리 제화점 소년을 고문해 거의 죽게까지 이르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외국인을 공식적으로 감시하고 제화점 소년을 고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짧게 끝났고 그는 그 병든 소년이 아직 수감자라며 이후에 그를 방문하고 싶다면 먼저 경찰서에 면담 신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살얼음판이 깨지지 않도록 걷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실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확실히 감옥 안으로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실종됐다는 것을 알리는 지역 전화가 울렸고, 내가 돌아왔을 때 법률위원회의 한 사람이 경찰서로 막 가려던 참이었다.”

”우리 외국인들은 자유가 거의 없으며 현재의 일본과 미국의 협정 하에서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미국 정부에 물어봐라.”

 

많은 고문 사례

“이번 사건은 특이한 사건이 아니다. 수백 건의 유사한 사례가 회자되고 있으며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모든 경찰서는 지구상에 있는 진정한 지옥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잔혹함의 끝이 거기에 있으며, 그러한 잔혹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행해진다. 남자들은 구타당해 죽고, 그들의 시신은 매장을 그의 친척들에게 넘겨지고, 어떤 이들은 평생 불구자가 될 때까지 구타당한 뒤 풀려나 죽은 날까지 가족들에게 부담이 된다.”

“제화점 소년은 인터뷰가 있기 33일 전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는 언제 재판을 받을 준비가 될까? 소년은 9개월 동안 교도소에 수감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재판에 회부되기도 전에 경찰들에 의해 사실상 결정됐다. 법원은 단순히 그를 형식적으로 재판하는 절차를 거쳐 경찰이 제시한 대로 형을 선고한다.”

“가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신에 대나무 몽둥이로 90대를 맞는 태형을 받고 풀려난다. 그런데, 이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90대씩 맞는 것이 3일 연속 매일 행해진다. 현재 개인병원에 실려 들어오는 많은 사례가 거의 다 끝날 때까지 구타를 당한 남성들의 사례다.”

“이 모든 것이 세계의 위대한 동맹국 회원이고 현대문명을 철저히 습득한 세계의 자랑스러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조롱은 언제 끝날 것이며 사람은 언제 진정한 존재로 불릴 것인가?”

 

여성에 대한 혐오적 대우

“다음은 1919년 4월 22일 한국에 거주하는 한 미국인이 서명한 성명서 내용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여성에 대한 조사는 가장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성 앞에서 무례할 때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반면, 한국과 중국 여성들은 유럽인들과 같은 섬세함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때 심한 수치심을 느낀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기에 한국 여성들을 신문실에 들여보낼 때 완전히 옷을 벗긴다. 신문실에 들어간 후에 옷을 벗기는 게 아니라 감금된 방에서 나올 때부터 일본 경찰에 의해 옷이 벗겨진다.”

“감방에서부터 여성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채로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열린 법정을 가로질러 걸어가야 한다. 어떤 때는 일본인 여성을 동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또한 씻을 때마다 감옥에서 입는 얇은 기모노를 벗고 벌거벗고 서 있어야 한다.”

“물론 그녀들의 공소장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고 조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굴욕의 고통을 가능한 최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잘 꾸며진 집에서 살았고 정중함을 배우고 살았던 여성 선교사뿐만 아니라 미혼 여성들도 이 정도로 극악무도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녀들은 길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는 이유로 가장 혐오스러운 말로 나쁜 여자라고 불린다.”

“몸을 가리려는 여성들은 두 손을 뒤로 묶이었다. 한 여성 선교사는 이 과정에서 팔이 뒤틀렸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배를 걷어차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미친 남자들에게 거칠게 다루어졌다. 우리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여성에 대한 독일인들의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끔찍한 정도는 독일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

“한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낮 동안 집에 있는 것은 여자들에게 안전하지 않다. 낮에는 산에서 떠돌아다니다가 밤에 집에 돌아온다.”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지는 진실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성들로부터 받은 진술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진술서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다.”

 

기독교 마을이 파괴되다

“일본군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 재팬 애드버타이저, 도쿄, 1919년 4월 29일.”

“다음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 가장 끔찍한 이야기다. 미국 부영사와 영국 영사 대행은 많은 이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안 잔혹한 행위에 대해 항의했다. 일본 총독은 마지못해 죄를 인정했고 다음의 기사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4월 16일 경기도 수원의 장날이 서는 팔탄면 마을 인근으로 여행을 떠난 서울 거주 선교사 H.H. 언더우드 씨의 성명서”

“그들은 오전 9시 30분쯤 언더우드 씨의 승용차로 서울에서 출발해 총 46마일을 약간 넘게 위치해 있는 수원과 오산을 거쳐 팔탄면으로 향했다. 팔탄면에 도착하기 약 2마일 전 마을 뒤에서 큰 연기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위해 차를 세워 놓고 언더우드 씨는 근처 민가 쪽으로 걸어가다 한 농부와 대화를 하게 됐다. 짧은 인사말 후 다음과 같이 대화했다.”

언더우드 – 이 연기가 뭐죠?

농부 – 마을이 불에 탔습니다.

언더우드 – 언제 탔죠?

농부 – 어제

언더우드 – 왜 불이 났나요?

농부 – (겁먹은 듯 주위를 살피며) 군인들이 그랬어요.

언더우드 – 왜요?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독립을 외쳤나요?

농부 – 아니요, 그런데, 그곳이 기독교인 마을입니다.

“점심 후 차를 타고 마을로 가다가 마을 입구에서 차로 개울을 건너는 것이 불가능해 차를 두고 걸어갔다.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는 주요 두 도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경찰서를 지나 걸어갔다. 경찰서 밖에는 78연대 군인들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데, 한 일본 경찰이 와서 어디 가느냐고 묻더니 경찰서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경찰서에 들어가자 두 명의 일본 장교가 일어나더니 떠나버렸다. 우리는 모두 그들이 어깨에 붉은색 어깨끈에 별 세 개를 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알기로 그건 선임하사관을 표시하는 배지였다. 우리에게 경찰서로 들어가라고 한 경찰관은 카빈총을 어깨에 메고 경관들을 따라갔다. 잠시 후 우리는 그들이 그 경찰관을 앞세우고 ‘○○’을 향해 떠나는 것을 보았다.”

“커티스 씨는 경찰관에게 카드를 내밀고 일본어로 대화했다. 나는 일본어는 하지 못했지만 조금은 알고 있어서 대화의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 서울에 있는 도로와 다리, 서로 아는 지인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커티스 씨는 마을에 난 화재에 대해 물었다. 그 경찰관은 마을에 작은 불이 났지만 큰불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단지 조금의 소동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 경찰관은 “조금 있었다”고 답하며 하지만 이젠 해결됐다고 했다. 조금 더 일반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커티스 씨는 불구경을 가고 싶다면서 인력거를 구할 수 있냐고 물었다. 경찰관은 “무슨 불이요?”라고 물었다. 커티스 씨는 근처에 난 불을 말하며, 그곳에서 서너 마일 정도 인력거를 타보고 싶다고 했다.”

“경찰관은 약간 놀라면서도 “예”라고 말하며 인력거 대기소까지 한 경찰관을 보내 인력거 세 대를 빌려왔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마을은 마을에서 1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우리는 잠시 인력거에서 내려 마을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우리 예측에 따르면 그 마을에는 약 40여 채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불과 네 개 혹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있었다. 나머지 집에서는 아직도 불꽃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우리는 마을 위 산비탈에 앉아 절망 속에 폐허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들을 보았다.”

“우리는 마을 전체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거리 위쪽에서 불에 심하게 탄 젊은이의 시체가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시신이 있던 곳 바로 옆이 교회였다. 그 시신이 놓여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마을길을 따라 산비탈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무리 지어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남성을 불렀다. 그는 머리를 두 손에 감싸며 그가 가진 모든 것들과 다년간의 시간을 들여 한 일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조의를 표하며 언제 불이 났는지 물었다. 그는 ‘어제 이맘 때쯤(오후 2시)’이라고 답했다.”

언더우드 – 어떻게 불이 시작됐나요?

한국인 – 왜나구요? 일본군이 그랬습니다.

언더우드 – 많은 분들이 화상을 입거나 다쳤나요?

한국인 – 일본 군인들이 교회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였어요.

언더우드 – 그들은 화요일 오후에 교회에 무엇 때문에 갔나요?

한국인 – 군인들이 와서 모든 기독교인은 교회로 모이라고 명령했어요.

언더우드 – 교회 안에 여자들도 있었나요?

한국인 – 아니요, 여자들은 오지 말라고 했어요.

언더우드 – 그런데, 교인이 교회에 모인 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한국인 –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검도 사용하고, 그 뒤에 교회에 불을 질렀어요.

언더우드 – 집에는 어떻게 불이 났나요?

한국인 – 교회에 난 불이 옮겨 붙었고 다른 쪽은 군인들이 불을 놓았어요.

언더우드 – 당신은 어떻게 살아났나요?

한국인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기독교인들만 모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언더우드 – 당신 집도 불이 났나요?

한국인 – 네, 우리 집도 불에 타버렸어요(가리키면서).

언더우드 – 하지만 몇 채의 집이 남아있는데, 저곳은 어떤가요?

한국인 – 불이 난 후에 저 집들은 그대로 있었어요. 불에 타지 않은 집들은 불을 지르지 않고 그냥 놔뒀어요.

 

교회에서 30명을 죽이다

언더우드- 교회에는 몇 명 정도 있었나요?

한국인 – 30명입니다.

“그 후 나는 다른 무리의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기들과 나이든 여자들과 19살에서 20살 정도 나이의 남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이 교회가 속해 있는 북감리교 선교부의 노블 박사를 알고 있었다. 나는 아까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질문을 했고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화재 발생시간, 사망자 수, 화재의 배경 등에 대해 답했다.”

“나는 한 젊은이에게 어떻게 살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언덕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밤에 돌아와 모든 친구들과 친척들이 죽어서 불탄 교회 건물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궁핍해졌다. 여기저기서 몇 가지 안 되는 생활용품마저 불에 타버리고, 생존자들에게는 남은 거라곤 소량의 쌀이나 곡식이 다였다. 그들은 그들 대부분이 가축들을 포함해 다음 해에 뿌릴 곡식의 씨까지 모두 잃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사진을 찍은 후에 작별을 고하고 마을을 지나 불에 타지 않고 온전한 집으로 걸어갔다. 그 집 주인은 매우 나이 든 노인이었는데, 자기 집은 홀로 불이 붙지 않았는데,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불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을 화재사건에 대한 그의 설명은 앞서 만나서 들은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동일했다.”

“그는 마을에서 몇 명이나 죽었는지도 몰랐는데, 약 서른 명 쯤으로 짐작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후 우리는 인력거로 돌아와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력거꾼들은 우리를 약 3마일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제안했는데, 그곳에도 며칠 전 이 마을과 유사한 일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 마을은 약 15군데가 불에 탔는데 대부분 기독교 센터들이 불에 탔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서울지역 담당 선교사들에게 전해진 보고서 형태로 요약됐다. 일본 군인들은 약 2주 혹은 열흘 전에 자동차를 차고 들어왔으며 당시 첫 마을 회관이 불에 탔다. 경찰서장은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고 보고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마을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폭력이 있었다는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측은 다른 곳에서 폭력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경찰과 헤어져 우리는 타고 왔던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5시 30분쯤이었다.”

“일본 총독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부대의 담당 중위를 처벌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처벌이라는 것이 현 근무지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승진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교회가 불타다

“기독교 교회 건물을 태우는 것은 현재 경찰을 포함한 군인들이 즐기는 취미생활인 것처럼 보인다. 교회를 불태우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기독교인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핑계를 대려는 시도가 있었다. 군부가 국민들을 선동해서 일을 벌이고 자신들은 뒤에 있다는 증거가 너무 명확했다. 그렇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살인과 방화에 관한 기사에서 보듯이 일본인 그들 자신이 했다는 사례는 많다.”

“우리는 교회 방화에 대해 두 건의 보도내용이 더 있다. 하나는 총독부 기관지인 The Seoul Press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선교사인 교회 목사가 불탄 교회를 철저하게 조사한 내용이다. 독자들은 이를 보고 자유롭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독교 교회가 불타다 (1919년 4월 13일, The Seoul Press)

화요일 오전 6시, 한 기독교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해 건물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손실액은 1만 엔으로 추산된다. 이유 없이 기독교를 혐오하는 일부 한국인들이 교회 건물에 방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교회 목사의 진술:

불타는 기독교회 – 4월 8일, 경찰들이 새로 지어진 큰 교회에 들어와 매트를 모으고 가구를 한데 모아 불을 질렀다. 그 후 그들은 불도 껐다. 기독교인들은 그 건물을 짓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건물 비용을 지불했다.

지난 4월 9일 밤에도 4월 8일처럼 대형 가연성 물질 더미 두 개를 설교단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 집사는 종을 울렸고 몇몇 기독교인들이 모여 함께 불을 껐다. 다음 날 아침, 교회 근처에 집이 있던 기독교인 경찰 사령관은 떠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핑계를 댔다.

4월 10일, 교회에 온갖 가연성 물질을 넣어놓고 석탄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 종을 울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아 교회는 불타버렸다.

4월 11일, 목사의 부인과 교회 간부 몇 명이 교회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불려가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불을 끄는 것을 돕기 위해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일본 경찰은 훈계까지 했다. 사실 밤에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심한 구타를 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대를 받는다.

일본 언론에는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교회 지도자를 반대하기 위해 교회를 불태웠다는 보도가 있다. 코멘트가 필요 없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일부 신문에서 격렬하게 반미 기사를 게재하자 장로교단 조사관들이 실시한 조사 보고는 다음과 같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기사들은 그들 자신을 대변한다. 정부가 그런 기사들의 발행을 허락하면 독자들은 언론의 관점을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언론은 항상 검열받고 있듯이 그런 기사들이 발행되면 정부는 도의적 책임을 지게 된다. 진실은 금지돼 있다. 거짓과 명예훼손만이 허용된다. 진실을 보도하는 행동들은 정부 간의 관계만 위태롭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