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3일 | 중화신보

3월 1일 이래 서울의 각 상점은 모두 휴업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안정을 찾은 것 같지만 인심은 매우 불안하다. 22일 밤 단성사에서 10분 휴식을 하는 틈을 이용해 갑자기 한 학생이 무대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관중 3,000여 명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서울은 위험하다.

다음날(23일 오후 9시) 서울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대문과 마포 등지에서 20여 대대의 전차 유리창이 박살났다.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저지하며 체포해 희생자 50여 명, 중상자 100여 명, 체포된 자 260여 명에 달했다. 그 외 봉경정, 훈련원, 녹본, 아현, 당산리, 신산리, 영등포, 동대문 부근, 도화동, 용산, 노량진, 공덕리, 마포, 종로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만세 소리를 힘차게 불렀다. 일본인은 많은 군경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