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6일 | 민국일보

(로이터통신) 3월 26일 오후 10시경 서울 재동과 종로 두 곳에서 만세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군경이 엄중히 경계에 나섰고 상점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전차 운행도 정지되었다. 시위운동이 크게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한인의 행동은 점차 과격해졌다.

3월 27일 저녁 한인들이 여전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용산철도 공장 한인 800여 명이 27일부터 동맹파업에 나섰다. 한인들은 처음에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다가 지금은 일치단결하여 행동에 나선다.

3월 29일 서울에서 보내온 전보에 따르면 이틀 사이에 독립운동이 모두 30차례 전개되었다고 한다. 3월 29일에는 서울 내외에서 20여 차례의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시위 군중이 이완용의 집에 달려가 돌을 던졌다. 서울의 공원에서 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고 후에 약 1,000명이 동대문에 모여 일본 군경과 충돌하였다.

일본 군대가 출동하여 가까스로 서울 시내의 시위활동은 멈추었으나 서울 외곽 5∼6곳에서 비슷한 시위운동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총검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켜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시위 발생 지역이 많고 참여 인원들도 많아서 일본 당국이 대처하기 어려운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