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2일 | 민국일보

서울에서 독립을 선포한 상황

3월 1일 태화관에서 회의를 개최한 (민족) 지도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학생 수천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한국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가행진에 나섰다. 시위대 앞에 관립 고등여학교 학생들이 앞장섰고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 군중이 미국 영사관 앞에 이르자 독립만세를 외쳤고 프랑스 영사관 앞에서도 그랬다.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총검을 휘둘렀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시위대를 지켜보던 행인들도 발길을 멈추고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녁 어두울 때쯤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평안북도 상성(桑城)에서 독립을 선포한 상황

3월 2일 오전 12시 흥성(興聖)전문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학교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그런 다음 대오를 지어 시내 거리를 행진하였다. 연도에 행인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시위대에는 노동자, 노인, 상인, 부인, 어린이들도 동참하였다. 독립선언서를 경무재판소와 의회에 전달하였고 사방으로 흩어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몇 명은 군중을 상대로 연설에 나섰다. 경찰서장은 군대를 동원하여 총검을 휘둘렀고 30여 명을 검거해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 기독교계 학교 교원 1명과 학생 17명이 급행 기차편으로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밤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3월 4일에도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다.